한 명의 소방관에서 시작된 일
2013년 김범석 소방관은 혈관육종암이라는 희귀병 판정을 받았고, 그로부터 7개윌 뒤에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유족이 실제로 보상을 받기까지는 5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당시의 사유는 공무수행 중 병에 걸렸다는 근거가 없다는 것. 2019년 9월이 되어서야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며 공무상 재해로 인정받았다. 이승우 대표는 2018년 고(故) 김범석 소방관의 사연을 알게 되었고, 이때 김범석 소방관의 이야기를 알리고자 119REO라는 이름으로 동아리를 만들었다.
119REO의 첫 활동은 폐방화복으로 만든 가방 펀딩. 펀딩은 시작한지 4시간 만에 100%를 달성하였고, 최종 725%를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마감되었다. 방화복을 소재로 택했던 이유는 방화복이 소방관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119REO는 소방 신고 번호인 119에 Rescue Each Other의 앞 글자를 더한 이름입니다. 소방관과 우리가 서로를 구한다는 취지를 담았습니다. 이 의미를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발견한 소재가 방화복이었는데요. 폐방화복으로 제품을 만들고 발생하는 수익을 소방관의 권리 보장을 위해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발생한 수익의 일부를 암 투병 중인 소방관이나 PTSD(심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가 필요한 소방관 등 그분들의 권리 보장을 위해 꾸준히 기부하고 있습니다.”
소방관을 구한 옷으로 환경을 구하다
방화복의 내구연한은 3년. 그 이후에는 기능이 저하됨에 따라 폐기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나의 방화복은 3년간 약 354회의 현장 출동에 동원된다고 한다. 훈련을 집계하지 않아도 거의 사흘에 한 번 꼴로 입게 되는 셈이다. 119REO는 내구연한이 지난 폐방화복을 비롯한 방열복, 소방 호스 등을 수거하여 제품을 만든다.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이중으로 세탁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옷을 하나씩 분해해서 원단으로 만들어 제품 공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가방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투리 천이 많이 나오는데요. 이걸 이용해서 카드지갑이나 팔찌도 만들고 있습니다.”방화복은 아라미드라는 화학섬유로 만들어졌다. 방탄섬유, 슈퍼섬유라고도 불리는 이 소재는 굉장히 질기고 튼튼한 덕에 소방관이 몸을 지키기에 용이하다. 그러나 이를 자연이 분해하는 과정에서 타 섬유보다 더 많은 탄소가 배출된다고 이승우 대표는 설명했다.
“아라미드는 화학적으로 결합이 굉장히 잘 되어있어요. 아무리 힘을 가해도 늘어나지 않고 500℃에서도 멀쩡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라미드가 폐기되면 이 결합을 깨고 분해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이를 패션으로 새활용하면서 소방관뿐만 아니라 환경까지 구하게 되는 거죠.”
기억을 간직하는 새활용
119REO는 작년 12월 롯데온과 함께 ‘러버덕 프로젝트 2022’를 진행하여 전시가 끝난 러버덕의 원단을 파우치로 새활용했다. 완충재로 폐방화복을 활용하면서 의미를 더하고, 파우치 중 119개는 송파지역 소방관에게 기부하기도 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유는 이승우 대표와 119REO가 새활용의 기준을 ‘기억과 의미’라는 키워드로 잡기 때문이라고.
“저희는 모든 소재가 새활용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패스트 패션과 새활용이 대항 지점에 놓여있다는 점은 동의합니다. 하지만 지금 같은 패스트 패션 시대 속에서 모든 소재를 새활용하겠다 표방하면 결국 패스트 패션을 지지하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새활용 소재를 선별하는 기준을 ‘기억과 의미’로 정했습니다. 기존의 것을 존중할 수 있고, 이를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를 토대로 새활용 분야를 고릅니다. 러버덕도 이 기준에 부합했기에 프로젝트에 참여했고요.”
또 119REO는 한국환경공단과도 인연이 있다. 작년 여름 폐현수막, 폐의류 등 섬유폐기물의 새활용 제품 공공구매 판로를 지원하고, 환경분야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위해 추진된 공단의 “새활용 제품 팝업 전시회”에 참여하여 폐방화복을 활용한 가방 등 제품을 선보임으로써 환경 인식을 개선하고, 친환경 소비를 유도하였다. 사회적기업 등 총 22개 업체에서 참여하였는데, 119REO레오가 선보인 새활용 제품은 독특한 소재와 질감으로 많은 눈길을 끌었었다.
국내에서 버려지는 방화복이 연간 약 70톤에 달한다고 한다. 이승우 대표는 버려지는 방화복을 통해 탄소중립 실현을 목표로, 아라미드가 순환 자원이 될 수 있도록 연구 중이다. 항상 소방관을 생각하며 환경에도 진심인 이승우 대표. 그는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물건을 구매할 때 쓸모가 있는지를 기준으로 잡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우리도 주변에 있는 것들 중 새활용할 수 있을 만한 소재를 찾아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