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 그 오래된 미래
어려운 때 큰일을 덜컥 맡아놓고도 그는 별로 허둥대지 않는다. 눈앞의 성과를 쫓기보다 영화제의 미래를 내다보며 한 걸음씩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자연’을 닮았다. 든든한뒷산처럼, 잔잔한 강물처럼, 곁에 있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든다. ‘농부’ 같기도 하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걸 의심하지 않고,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차분히 해 나가는 사람. 며칠째 수면 부족 상태라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영화제 기간은 8월 10일부터 15일까지였고, 인터뷰는 14일에 이뤄졌다),그는 순한 눈빛과 환한 낯빛으로 방문객을 반긴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올해로 19회인데, 스무 돌을 앞둔 시점에서 영화제의 폐지 또는 축소 이야기가 들려왔어요. 이 영화제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너무 속상한 소식이었죠. 그러던 중 음악영화제니까 음악가가 영화제를 총괄해야않겠느냐며 저에게 제안이 들어왔고, 결국 설득됐어요.”
2회 때부터 집행위원으로 활동해왔지만 ‘위원장’이 되니 영화제가 다시 보였다. 마치 ‘게스트’에서 ‘호스트’로 건너온 느낌이었다. 낯설었지만 즐거웠다. 먼저 지역 시의원, 지역 언론사등을 만나 여론부터 살피고 헤아렸다. 이후 영화제 진행과 관련된 각계 사람들을 만나 ‘설득’하고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니 설득했다는 말보다 ‘진정성’을 전달했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 당장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하기보다, 영화제의 가치와영화제의 비전을 전달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였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올해 구호가 ‘다 카포(Da Capo)’예요.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의 음악 용어죠. 그동안 영화제가 쌓아온 성취들, 그 안에 담긴 마음들과 열정들, 그것들을 잊지말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음악감독답게 기획공연을 많이 늘렸다. 올해 제천영화음악상 수상자는 지난 3월 타계한 사카모토 류이치다. 그에 대한 헌사의 의미로 마련한 <사카모토 류이치 트리뷰트 콘서트>를비롯해 <필름 뮤직 O.S.T 콘서트> <필름 콘서트-올드보이> <레전드 오브 록> 등을 마련해 영화와 음악의 감동을 다양하게 누리도록 했다.
자연 속에서 음악과 영화를 만나는 행복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2005년부터 매년 8월에 열리는 국내 유일의 음악영화제다. 계절은 아직 여름. 수려한 자연경관이 돋보이는 도시에서 영화와 공연을 함께 즐기는, 국내 최고의 휴양영화제이기도 하다. 제천에는 ‘육지 속 바다’라 불리는 청풍호가 있다. 청풍호반 특설무대에서 열리는 ‘원 썸머 나잇’은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대표하는 공연이다. 코로나19로중단됐던 수변 공연이 ‘초심으로’ 돌아간 올해 다시 시작됐다.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관개용 저수지인 의림지에선 가 열렸다. 음악과 영화가 자연을 만났을 때 어떻게 시너지를 내는지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개막식도 청풍호반에서 열 계획이었는데, 태풍 때문에 제천 체육관으로 장소를 급히 변경했어요. 아쉽게도 올해는 개막작을 야외에서 보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지만, 우리 영화제를찾는 오랜 팬들에게 그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아요. 호수를 옆에 끼고 영화를 감상한다는 건 제천에서만 누리는 축복이거든요. 의림지도 참 좋아요. 그곳에 수령이 삼사백 년 된소나무 숲이 있어요. 천혜의 자원들을 잘 활용해서 점점 더멋진 축제가 되도록 노력하려 해요.”
작업의 원동력, 식물
‘천재’라는 꼬리표를 그는 매우 쑥스러워한다. 하지만 붙일 수 밖에 없다. 십 대 시절부터 영화음악가의 꿈을 꿨던 그는 이십 대인 1994년 영화 <구미호>로 데뷔해 1996년 <은행나무 침대>로 영화음악가로서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초록물고기> <쉬리> <퇴마록> <태극기 휘날리며> <7번 방의 선물> <아이 캔 스피크>….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영화음악들을 만든 결과 1997년 제35회 대종상영화제 음악상 등을수상하며 한국 영화음악계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2015년에 작곡한 아시아 축구연맹 공식 주제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AFC 주관 경기의 선수 입장곡으로 활용되고있다. 음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면서, 자기만의 바다를 그는 묵묵히 헤엄쳐왔다.
“자연에서 위안을 많이 얻는 편이에요. 작업실에 식물이 많아요. 나무를 좋아해서 하나둘 키우다 보니 어느덧 120그루 정도가 됐어요. 식물을 기르기 시작한 건 영화 <구미호> 를작업하던 이십 대 중후반 부터예요. 작은 오피스텔로 독립하면서, 벤자민나무를 사서 창가에 뒀어요.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 내내 식물과 함께하고 있네요.”
작업실 문을 열면 숲 냄새가 사람을 반긴다. 각종 허브는 기본이고, 귤나무며 재스민, 레몬, 브론페시아 등 향 좋은 식물들이 각자의 향기를 조화로이 내뿜는다. 작업실이 ‘미니 식물원’이 되기까지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식물 하나하나가 필요로 하는 조건들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도 완벽한 건 아니다. 여전히 실수투성이지만, 식물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채광과 환기, 수분공급 등을 기쁘게 해 나가고 있다.
“나무에 물을 흠뻑 주고 난 뒤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를 내리는 시간, 그때가 가장 행복해요. 한껏 목을 축인 식물들이 저를 보고 환히 웃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그 순간의 짧은 교감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좋더라고요. 물 먹은 화분에서 흙냄새가 올라오는 것도 참 좋아요. 오감이 열리는 느낌이에요. 새싹이 올라오거나 꽃망울이 맺힐 때의 감동도 말하고 싶어요. 어느 겨울날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선인장이 꽃을 피웠더라고요. 순간 눈물이 났어요.”
"물 먹은 화분에서 흙냄새가 올라오는 것도
참 좋아요. 오감이 열리는 느낌이에요.
새싹이 올라오거나 꽃망울이 맺힐 때의
감동도 말하고 싶어요.
어느 날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선인장이 꽃을 피웠더라고요.
순간 눈물이 났어요."
식물과 교감하기 시작한 뒤로 자연을 향한 애정도 덩달아 커졌다. 곡을 짓다 길이 막히면 집 근처 올림픽공원으로 산책을 나서는데, 거기서 만나는 그 계절의 나무들로부터 그는 아주 좋은 에너지를 얻는다. 그가 아는 예술가 중에는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중요 역할이 ‘위로’라는 점에서, 예술과 자연은 이미 ‘한 배’를 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가 음악을 맡은 영화 <1947 보스톤>이 곧 개봉해요. 현재 작업 중인 솔로 앨범은 내년쯤 발표할 예정인데, 그 안에 친환경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를 꼭 넣고 싶어요.”
자연이 주는 위안 덕분에 지치지 않고 작업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어김없이 싹을 틔우고 틀림없이 꽃을 피우는 치열함. 나무들로부터, 자연으로부터, 그걸 배운 듯하다고. 그의 맑음과 강함이 어디에서왔는지 비로소 알아낸 셈이다. 가보지도 않은 그의 작업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나무들의 미소가 저기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