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잃은 것들로 만드는 쓸모 많은 것들
고라니, 두더지, 지렁이…. 반려견과의 산책길에서 그가 가끔 만나는 것들이다. 고양시 덕양구의 한 동네. 4년 전 창밖으로 북한산이 보이는 이곳으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평소 마주할 기회가 거의 없던 동물들을 그는 수시로 접하며 산다. 미처 알지 못했던 들꽃과도 부쩍 친해졌다. 풀과 꽃과 흙의 냄새를 일일이 맡는 반려견 덕분에, 자주 멈추고 깊이 바라보는 일이 그에게도 매우 익숙해졌다. 작업실 건물 외벽엔 그가 심은 조롱박 넝쿨이 담장을 한창 기어오르는 중이다. 작은 즐거움이 삶 속에 가득하니, 환한 조명이 날마다 마음속을 밝힌다.
“좀 웃긴 표현인데, 요즘 제가 행복한 이유가 ‘쓰레기를 만나서’인 것 같아요. 바다 쓰레기로 조명을 만들기 시작한 뒤로 삶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고, 그 변화가 삶의 즐거움으로 이어지고 있어요.”
그가 바다 쓰레기에 처음 관심을 가진 건 2015년의 일이다. 해양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제주의 문화사업체 ‘재주도 좋아’에서, 서울의 금속공예 작가들과 전시회를 연다는 뉴스를 접하면서다. 너무 좋은 취지의 전시회라 이듬해부턴 자신도 꼭 참여하고 싶었다. 공모소식을 혹여 놓칠까, 수시로 사이트를 들락거리던 2016년 어느 날 그에게 거짓말처럼 연락이 왔다. 그 전시회에 작가로 참여해달라는 소식이었다.
“제주의 비치코머(해양 쓰레기를 수집하는 사람)들이 쓰레기를 모아서 보내주면 서울의 공예 작가들이 그걸로 작품을 만드는 프로젝트예요. 비치코머와 공예 작가가 1:1로 연결돼 작업하는데, 저는 바다 쓰레기 가운데 어업용 부표들을 공급받아 작품을 만들었어요. 플라스틱 부표들의 다양한 색감과 모양이 너무 매력적이더라고요.”
그 매력을 백분 살려 손전등을 만들었다. 쓸모를 잃고 버려진 부표가 또 한 번 버려지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평소 공예의 ‘쓰임’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부표라는 바다 쓰레기를 만나 그 관심을 더욱 키워갔다. 비록 한 번 버려졌으나 쓸모가 생겨 일상으로 돌아오는, 쓸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조명을 만들고 싶었다.
바다 쓰레기, 영감이 되다
“제 친구가 손전등에 ‘손등대’란 이름을 붙여줬어요. 듣는 순간 ‘이거다’ 싶더라고요. 캄캄한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막막한 누군가의 앞길을 밝혀주길 바라면서 작품을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바다 쓰레기로 손등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2014년 학교를 졸업한 뒤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찾던 그에게‘그 세계’가 마침내 열린 것이다. 이후 그는 부표들을 찾아 우리 땅 곳곳을 누볐다. 주로 동해안에 갔다. 고성, 속초, 양양, 강릉…. 해안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바다 쓰레기를 줍고 또 주웠다. 그 여정에 반려견이 함께했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둘만의 여행이었다
“지금은 제주클린보이즈클럽(제주 앞바다의 쓰레기를 날마다 줍는 청년봉사단체)에서 부표들을 공급받고 있어요. 지난해부터 바다 쓰레기로 조명을 만드는 일반인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는데, 재료가 많이 필요해지면서 혼자 주운 것들로는 감당이 안 됐거든요. 제주클린보이즈클럽에
조심스레 문의했더니, 힘들게 주운 해양 쓰레기가 결국 다 폐기된다더라고요. 그래서 용기를 냈어요. 수거해서 제게 보내주되 쓰레기에 값을 매겨 팔라고 했죠. 그동안 자비로 구매해오던 마대며 장갑, 집게 등을 그 돈으로 샀으면 했거든요. 고맙게도 선뜻 응해주셨어요. ‘레어템’을
주우면 자기들도 기쁘다고 말해주셔서 참 기분 좋아요.”
제주에서 올라온 부표들은 당장 재료로 쓸 것들을 제외하고 옥상이며 주차장에 모아둔다. 비도 햇살도 바람도 그대로 맞게 한다. 빛바랜 그 자체가 이미 ‘예술’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는 결코 낼 수 없는, 오직 ‘자연’만이 만들어내는 그 색이 너무 좋아서 그는 별도의 색칠을 하지 않는다. 긁히거나 깨진 부분도 손대지 않고 그냥 쓴다. 부표의 자연스러움이 금속의 인공미와 만나 환상의 균형을 이룬다.
“제가 직접 수거할 때보다 쓰레기의 양이 많아지니 영감도 덩달아 늘어나더라고요. 쫙 펼쳐놓고 한참을 바라보면, 이런저런 아이디어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라요. 쓸모없어진 것들이 스스로 쓸모를 만들어내죠.”워크숍으로 만나는 수강생들에게도 그는 큰 고마움을 느낀다. 수업을 준비하는 데 품과 힘이 많이 들지만, 그들 덕분에 ‘다른 시선’을 꾸준히 접할 수 있다. 가장 기쁜 건 그들에게 해양 쓰레기 문제를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바다쓰레기를 직접 주워 와서 조명을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수강생들을 볼 때마다, 자신의 작업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된다.
“오는 11월에만 세 곳에서 전시회를 열어요. 부표로 만드는 조명 키트도 곧 개발할 생각인데, 키트를 보급하면 더 많은 부표가 필요해질 테고 결국 더 많은 바다 쓰레기를 줍게 될 거예요. 바쁘지만 기쁘게 해나가야죠.”
새것 가득한 세상에서
헌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기쁨
그는 공대와 미대를 모두 다닌 이색 이력의 소유자다. 처음엔 신소재공학을 전공했다. 2학년 때 주얼리 세공 코스가 생겼는데,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던 그의 적성에 잘 맞았다. 이후 공예학과로 편입했다. 돌아보니 그게 참 도움이 된다. 공예 작가는 숫자를 계산하고 비율을 정하는 일이 잦은데, 공대에서 각종 공식을 다뤘던 경험이 아주 큰 힘이 된다.
“전엔 강박증과 편집증이 조금씩 있었어요. 제대로 정돈돼 있지 않거나 미리 정확히 준비하지 않으면 무척 불안
했거든요.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바다 쓰레기로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스스로에게 관대해졌어요. 환경 관련 실천도 일상 속에서 조금씩 늘려가는 중이에요. 요샌 개와 산책할 때 생분해 비닐로 된 배변봉투를 들고 다녀요. 모르는 개의 배설물을 발
견하면 제가 대신 치우고요. 바다 쓰레기를 만난 뒤로 무언가를 더럽다고 생각하는 일이 확연히 줄었어요.”
그가 입고 있는 작업용 앞치마는 ‘재활용의 대가’인 그의 어머니가 청바지를 수선해서 만들어주신 것이다. ‘멀쩡한’물건들을 수시로 주워 오는 어머니를 보며 자란 그는 어느새 새것 가득한 세상에서 헌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되어 있다. 행복은 발견하는 자의 것이다. 그의 환한 미소가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