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감’의 다른 말, 그림
그에게 그림은 곧 ‘쉼’이다. 요즘처럼 일정이 많을수록, 낮게 콧노래를 부르며 곱게 스케치를 하는 순간들이 그는 참 좋다. 그의 캐리커처엔 흔히 말하는 ‘예쁨’이 담기지 않는다. 하지만 매우 눈부시다. 그림 속 주인공과 주고받은 마음이며 웃음이, 캔버스에 고스란히 담기는 까닭이다. “원래 예뻐요.” “안 예쁜 얼굴은 없어요.” 자신을 예쁘게 그려달라는 이들에게 그가 자주 하는 말이다. 뻔한 덕담도, 괜한 농담도 아니다. 모든 사람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그는 말이 아닌 그림으로 번번이 설득해낸다.
포옹으로 편견을 부수다
“8월 말에는 개인전도 가졌는데, 타이틀이 <포옹전>입니다. ‘은혜 씨’의 사진들 중에 누군가를 안고 있는 장면이 유독 많아요. 은혜 씨는 포옹할 때 상대방의 품에 포옥 들어가 버리는데, 이 친구를 껴안은 분들의 표정이 말 그대로 무장해제 상태예요. 사람들 품으로 들어가 그들을 웃게 만드는 것. 그게 은혜 씨의 역할이었구나 싶어요.”
“은혜 씨는 욕구가 소박해요. 그림을 그리거나 강아지와 노는 것만으로도 아주 쉽게 행복해져요. 삶의 스펙트럼이 좁기 때문에 불필요한 소비도 적어요. 그러니 환경에도 별로 죄를 짓지 않아요. 거짓말도 못해요. 이익을 따지거나 손해를 계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히 표현하죠. 삶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은혜 씨 덕분에 많이 깨졌어요.”
그림을 타고 세상 속으로
은혜 씨가 언제나 ‘지금 같았던’ 건 아니다. 동굴 안에 스스로를 가둔 듯 방 안에 홀로 숨어 지내던 때가 그에겐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아무 데서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던 때였다. 홀로 뜨개질을 하거나 혼자 드라마를 보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딸의 ‘텅 빈 눈동자’에 가슴이 미어진 어머니가 그에게 제안했다. 월급을 줄 테니 자신이 운영하는 화실에서 청소며 뒷정리를 해달라고. 화실로 출근한 지 얼마 안 된 2013년 어느 날이었다. 구석에서 은혜 씨가 무심코 그린 그림 한 장이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였다.
자연 속에서 사람과 함께
“그 모든 시간을 은혜 씨와 함께했어요. 강변의 사계절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느끼면서요. 기억에 남는 손님들이 많지만, 두 아들의 엄마였던 한 분이 유독 잊히지 않아요. 남편이 갑자기 사망했는데 가족사진을 미처 못 찍었다면서, 아들들과 아빠 사진을 따로 줄 테니 가족이 다 모인 것처럼 그려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은혜 씨가 그걸 그렸어요.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은 적이 있는 은혜 씨가 그림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는 걸 볼 때 가슴이 뭉클해요.”
“배우와 제작진 얼굴을 제가 다 그려줬어요. 버스 안에서 전시회도 했고요. 행복했죠.”
화제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영옥(한지민 분)의 쌍둥이 언니 영희로 출연했던 그는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을 온통 행복의 무늬로 떠올린다. 촬영은 지난해 10월 말부터 올해 2월 초까지 이어졌다. 추운 날이 꽤 많았는데도, 돌아보면 마냥 따뜻한 추억뿐이다. 같이 출연했던 배우들과 요즘도 가끔 대화를 주고받지만 ‘그때 그 감정’에 매달리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다.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또 다른 그림을 그리면서, 새로운 즐거움 속으로 기꺼이 들어간다. 그의 교감도, 그의 그림도, 강물처럼 흐른다.
정은혜 작가의 어머니 장차현실 씨의 말이다. 포옹은 팬데믹 이후 우리가 가장 그리워했던 행위 중 하나다. 그 ‘그리움’을 그림으로 옮기는 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에도 따뜻한 미소가 걸린다. 만화가인 장차현실 씨는 자신의 딸을 ‘은혜 씨’라 부른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성인들을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들은 오히려 비장애인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어른’일 때가 많다는 게 어머니의 생각이다. 먼저, 은혜 씨는 온전히 ‘오늘’을 산다. 오늘은 뭘 그릴까, 오늘은 뭘 떠볼까(뜨개질), 오늘은 뭘 먹을까…. 그것만 생각하고 거기에만 마음을 쏟는다. 먼 곳의 신기루를 좇느라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현대인에게 이보다 멋진 ‘스승’이 없다.
“지면광고 속 여성 모델을 옮겨 그렸는데, 선(線)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은혜 씨의 그림을 처음 본 거였기 때문에 매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죠. 그때부터 계속 그려보게 했어요. 그림으로 성공할 거란 기대 때문이 아니라, 그림으로 세상과 연결됐으면 하는 바람으로요.”
어머니의 소망이 ‘현실’로 이뤄진 건 2016년의 일이다. 양평 문호리 강변에서 열리는 예술가들의 플리마켓(일명 ‘리버마켓’)에 은혜 씨가 당당히 셀러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매일 새롭게 옷을 갈아입는 문호리 강변에서, 자신의 부스를 찾는 사람들의 얼굴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이 어느덧 4,000여 점이다. 은혜 씨는 자신에게 그림을 부탁하는 손님들을 ‘고유한’ 존재로 바라봤고, 리버마켓에서 함께 활동하는 예술가들은 그를 ‘존엄한’ 존재로 대해줬다. 깊게 앓았던 시선강박도, 가끔 드러냈던 과잉행동도 어느새 사라졌다. 사람이, 자연이, 최고의 ‘치유제’였다.
다큐멘터리 영화 <니 얼굴>은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아티스트로 성장해가는 은혜 씨의 여정을 아버지 서동일 감독이 기록한 것이다.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공식 초청작이자 제18회 서울환경영화제 한국환경영화부문 우수상 수상작인 이 영화가 지난 6월 개봉되면서, 은혜 씨는 아버지와 전국 곳곳을 돌며 상영회와 GV(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했다. 말이 GV지 ‘팬미팅’에 가까웠다. 가는 곳마다 은혜 씨를 향한 응원과 선물이 쏟아져서, ‘언제 이런 세상이 왔지?’ 싶었다고 어머니는 고백한다. 하지만 은혜 씨의 표정은 좀 다르다. 세
상이 늦게 ‘발견’했을 뿐, 자기만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은혜 씨는 ‘살아 있는’ 것들을 그려요. 사람뿐 아니라 개와 고양이 같은 생명체를 화폭에 담죠. 은혜 씨가 그리는 개는 동생이 데리고 온 유기견 ‘지로’예요. 그림 그리는 은혜 씨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다 그릴 때까지 기다려줘요.”
앞으로 꽃을 그려보고 싶다고, 은혜 씨가 불쑥 고백한다. 봄에 피는 꽃, 여름에 피는 꽃, 가을에 피는 꽃….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지, 꽃이 사람보다 아름다운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에겐 모두 그 자체로 온전히 아름다울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해요. 꿈을 다 이뤘어요.”
자신이 그려나갈 꽃처럼 은혜 씨가 웃는다. ‘작지만 큰’ 그의 품에 불쑥 안기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