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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달빛이 환하였다. 무서리가 내리고 소슬바람이 불었다. 가을까지 이어진 긴긴 장마는 태풍을 몰고 왔고, 해안은 플라스틱과 스티로폼 조각들로 뒤덮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아름드리 통나무들과 북에서 떠밀려왔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오래된 목선의 잔해들 또한 모래불 위에 흩어져 있었다. 산속 계류와 바닷물이 서로 스미고 뒤섞였을 것이나 바다는 푸르디푸른 채 아무 말이 없었으나 태풍 뒤끝은 강렬하여 김장밭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서 강말랐다. 마늘 파종이 늦어지고 있었다.
추수를 끝낸 논들엔 참새떼가 회오리바람처럼 오갔고, 맑고 투명한 하늘가엔 기러기 떼가 열을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해 질 무렵이면 부엉이 울음소리가 정적을 흔들었다. 송지호에 겨울 철새인 고니 떼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며 겨울이면 남쪽으로 떠나곤 했던 백로 떼는 연어가 올라오는 터진목을 지키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한여름 냇가를 가로지르곤 하던 물총새와 꼬마물떼새, 원앙들이 떠나고 붉은머리오목눈이와 함께 갈대밭을 옮겨 다니던 개개비 또한 눈에 띄지 않았다. 겨울 활동지로 떠난 듯했다.
큰 산 산마루는 무채색으로 변하였으나 숲 기스락은 여전히 붉고 푸르고 노랗게 물든 채 바람결에 술렁거렸다. 억새꽃은 해 질 녘이면 은빛으로 빛났고, 논두렁에 산국은 더욱더 새뜻해졌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상강(霜降)과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立冬) 사이는 불에 덴 듯 홧홧하지도 살을 에는 듯 춥지도 않았다. 감나무 감들이 색을 더해 가는 동안 들깨밭은 마당질이 끝났다. 그러나 서리가 내린 뒤에야 영근다는 서리태콩은 여태도 시퍼렜고 비닐하우스에 고추는 흰 꽃을 피웠다.
후다닥 짐승이 냅뛰는 소리였다. 수로는 일 미터가 넘었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한번 빠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인기척에 놀란 고라니는 수로와 이어진 산기슭으로 뛰어올랐으나 발을 내딛기도 전에 뒤로 나뒹구는 듯하더니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뒤 다시 또 뛰어올랐지만 이번에도 수로를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며칠 전에도 그 위쪽 수로에서 갈팡질팡하는 고라니를 보았던 터였다. 산기슭에 난 수로는 위로는 산골짜기로 이어졌고, 아래로는 난들까지 이어지고 있었지만 아래쪽은 수로를 가로지르는 논길로 인해 굴이 낮았고, 위쪽은 또 높이가 만만찮았다. 가만히 지켜보는 동안 고라니는 더 이상 둑 위로 뛰어오르지 않았다.
메마르고 거칠어진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어대는 동안 길섶 숲 기스락에 모로 누워 있는 너구리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살아 있었더라면 못 보았을 너구리였고, 숨을 거둔 지 오래지 않은 듯 이빨을 드러낸 채 굳어 있었지만 털빛은 생생했다. 내생이든 전생이든 믿지 않았지만 그렇더라도 너구리의 내생이 평안했으면 하고 잠시 기도했다. 매일 그곳을 지날 때마다 너구리는 조금씩 빛을 잃었고, 몸피는 줄어들었다. 육신을 벗어버리는 일이 저토록 힘겨우면서도 무심할 수 있구나 싶어서 곁을 스쳐 지날 때마다 두 손을 모았다. 풀숲으로 옮겨주고자 했던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죽은 자리에서 온전히 육탈하는 것도 너구리의 운명이지 않을까 하여 손길을 멈추었다.
체로키족 언어로 11월은 산책하기 좋은 달이라고 하고, 아라파호 족은 또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한다지만 조선 후기 때 문인 정학유가 쓴 「농가월령가」 시월령에 따르면 (이때 시월(10월)은 음력이므로) 시월은 맹동(孟冬) 즉,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로 배추 무를 수확하여 김장도 하고 메밀을 찧어 국수도 말고 소, 돼지를 잡아 잔치도 벌이며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철이었다. 요즘은 김장을 하여도 김치냉장고 등을 이용하였으므로 움집을 짓거나 땅속에 묻지 않았다. 김장을 하는 때도 제각각
이었고 아예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농촌인 우리 마을은 한해 농사 마무리는 김치 담그기였다.
올해 우리 마을 김장밭은 장마와 폭우로 배추와 무가 망가지고 통도 제대로 앉지 않았고, 이어진 가뭄으로 시들시들했다. 인간은 자연을 아무렇게나 훼손하고, 자연은 또 때때로 무자비하였으니 인간과 자연이 서로 조화로웠던 때가 과연 있기는 있었는지 의심스러웠다. 한 치의 양보 없이 맞서는 싸움꾼처럼 여겨질 때도 없지 않았다. 태풍이 폭우를 몰고 올 때마다 마을은 낮게 엎드렸고, 굴착기 삽날에 파헤쳐진 숲은 또 놀란흙으로 시뻘겠다. 자연은 말하지 않았으므로 영혼을 가진 인간이 자연에 접근할 때 조금 더 세심하고 찬찬히 접근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잣나무를 타고 오르내리던 청설모 한 마리가 겅중겅중 나뭇가지를 건너뛰어 눈앞에서 사라졌다. 청설모가 떨어뜨린 잣송이는 먹잘 것 없는 굴퉁이들뿐이었다. 실수로 떨어뜨린것이 아니라면 잣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다람쥐 손을 타고남은 도토리와 산밤들 또한 벌레가 먹거나 구새먹은 것들뿐이어서 더 이상 맛을 볼 수 없었다. 이 대지에 인간만이 살고있는 것이 아님을 자주 잊었다. 달이 기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