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모포비아 그리고 투명하고 정의로움
세정제, 살균제, 화장품, 방향제 등 우리는 생활 속에서 수많은 화학제품을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고 이를 통해 우리 몸속에 화학물질이
축적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적지 않다. 케모포비아로 인해 일체의 화학물질이 들어간 제품사용을 거부하는 노케미족이 등장하기도 했다.
과연 우리가 생활 속 화학물질을 피하는 것만이 능사인지 고민하는 시민들이 적지 않다. 이에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교수이자
(사)한국독성학회 회장 이병훈 교수의 글을 통해 일상생활에서 케모포비아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글. 이병훈 교수(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교수, (사)한국독성학회 회장)
화학물질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시대를 사는 법
산업의 발전과 인간생활의 다양화로 편리함과 유익함이 추구되는 과정에서 화학물질의 사용은 점차 증가되어왔고, 인간은 결국 자신이 사용한 화학물질의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게 되는 비극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화학물질의 부적절한 관리로 인해 일어났던 최근의 사건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소비자는 불안해하고, 화학물질을 생산하는 기업도, 이를 관리하는 국가도 모두 긴장하기 시작했다. 화학물질이 들어간 제품을 되도록 쓰지 않으려는 노케미족이 등장하고, 케모포비아(chemophobia)라는 화학물질공포증이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등장하기까지 했다. 화학물질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시대에 살면서 화학물질을 기피하는 이 사회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OECD는 국민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11개 지표를 점수로 산정하여 각국의 삶의 질을 평가할 수 있는 더 나은 삶 지수(BLI : Better Life Index)를 매년 발표한다. 이중 건강관련 지표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매우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건강지표는 두 개의 세부지표로 구성되어있는데 하나는 일반적 건강상태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기대수명(Life Expectancy)’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본인의 건강상태를 평가하는 ‘자기보고 건강상태(Self-reported Health)’이다. 한국은 ‘기대수명’에서는 36개국 중 10위의 높은 순위를 보인 반면, ‘자기보고 건강상태’에서는 꼴지를 차지하여 전체 건강지표는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즉, OECD 국가 중 한국인의 객관적 건강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지만, 스스로는 본인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고 판단한다는 의미이다.
건강염려증(Illness Anxiety Disorder; Hypochondriasis)은 실제로는 질환이 없는데도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해석하여 스스로 질병에 걸려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일종의 정신질환이다. 통계적으로는 국가 간 큰 차이 없이 5% 전후의 유병률을 보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나 개개인의 건강에 대한 염려가 우리나라 국민이 유달리 심하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 한 가지로 최근 우리 사회에 번지고 있는 케모포비아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
생활 속 화학물질의 리스크는 고유의 독성과 노출되는 양의 함수로 판단해야
우리는 화학물질의 ‘위험성’을 얘기하면서 정작 위험성의 정확한 의미는 간과하며 이 용어를 사용해 왔다. 화학물질의 위험성은 ‘음주운전은 위험하다’라든지 ‘지뢰제거는 위험한 작업이다’라고 얘기할 때의 위험성과는 다른 의미이다. 화학물질의 위험성은 그 화학물질이 갖고 있는 고유의 독성과 인간에게 노출되는 양의 함수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과 씨에는 아미그달린(amygdalin)이라는 맹독성 청산배당체가, 배에는 1급 발암물질인 포름알데히드가 함유되어있다. 이런 예는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감자와 호박에는 각각 솔라닌(solanine), 쿠쿠르비타신(cucurbitacin)이라는 독성물질이 들어있다. 하지만 누구도 이들 식품을 먹는데 위험성을 이유로 피하지 않는다. 이들 식품을 통해 독성물질에 노출되는 양은 이들이 우리에게 해를 입힐 정도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즉, 화학물질의 위험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척도는 그 물질의 독성뿐 아니라 그 물질이 우리에게 노출되는 용량 또한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따라서 언론은 식품 중 혹은 환경매체 중 특정 독성물질의 ‘검출’ 자체를 침소봉대하여 보도할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그 위험성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정확한 ‘위험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감자와 호박에는 각각 솔라닌(solanine), 쿠쿠르비타신(cucurbitacin)이라는
독성물질이 들어있다. 하지만 누구도 이들 식품을 먹는데 위험성을 이유로 피하지 않는다.
이들 식품을 통해 독성물질에 노출되는 양은 이들이 우리에게 해를 입힐 정도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안전한 것과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의 차이
화학물질의 독성을 연구하는 학문을 독성학이라고 한다. 독성학은 규제의 학문이다. 대개의 학문은 ‘연구를 통해 개발한다’는 R&D 즉, ‘Research & Development’를 의미한다. 하지만 독성학의 기본은 ‘연구를 통해 규제한다’는 R&R 즉 ‘Research & Regulation’이다. 이때 규제는 적절하고 정당하고 최신의 연구방법으로 얻은 결과에 기초해야 한다. 여기서 나온 자료를 바탕으로 역학, 보건학 등 연관된 분야 학자들과 협업을 함으로써 인간에 미칠 위험성을 평가해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발생했던 화학물질 사고는 이 과정이 투명하고 정의롭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화학물질이 안전한 것과 안전하게 느끼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2년 전 우리나라를 강타한 달걀 살충제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농림축산식품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달걀 살충제와 관련한 위해성 평가의 결과를 발표한 이후 소비자들의 불신으로 극심한 비난을 받았다. 당시 정부는 하루에 어린이는 수십 개, 성인은 백여 개의 달걀을 평생 먹어도 건강에 큰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다. 물론, 이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여 내린 결론이었을 테지만 국민이 느끼는 불안과 불신을 해소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한 발표였다. 엄마들에게는 당장 아이가 먹을 반찬에 살충제에 오염되었을지도 모르는 달걀을 쓰는 것은 극도로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러한 정서를 무시한 채 과학적 사실만을 건조하게 전달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살충제 달걀 사건은 그나마 20년 전 일어난 분유 중 프탈레이트 오염 사고의 경우에 비하면 훨씬 정직한 대응이었다. 그 당시 식품의약품안전본부에서는 프탈레이트 잔류량의 확인도, 하루섭취허용량의 기준도 모호한 채로 시판되는 유제품의 절대적 안전성을 홍보하고 무해함을 발표하였다. 이런 사건의 반복은 불신을 키워 왔으며,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노케미족이 나타나고 케모포비아가 탄생된 것이다. 정부는 이런 사회현상의 확산을 막고 그간의 불신을 신뢰의 정책으로 전환하려면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춘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 사실 리스크 커뮤니케이션은 과학적 지식이나 첨단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해당사자들과의 끊임없는 소통과 교감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감성적 기술의 분야가 아닐까 생각된다.
※ 이 기사의 내용은 한국환경공단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