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와 함께

문명의 시작과
끝에 대한 이야기

임기웅 감독

  • 임기웅 감독의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대한 쓰레기 앞에서도, 힘없는 어르신 앞에서도 강인하게 카메라에 담아낼 수 있었던 그의 용기는 대단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문명의 끝에서>로 쓰레기의 여정을 담아낸 그의 다음 목적지는 백령도다.

    writer. 최행좌 photo. 한상훈, 임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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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처리에 대한 여정

인천의 도시·생태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기록해온 임기웅 감독은 영화 <문명의 끝에서>를 통해 현대 사회의 이면에 가려진 쓰레기 처리과정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이 영화는 길거리의 쓰레기와 폐지 등 재활용품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수도권매립지로 향하는지 추적하는 1부와 청년 예술인의 시선으로 본 재개발 등 정비사업과 건설폐기물의 문제를 다룬 2부 ‘나의 살던 고향은’으로 구성됐다.
이야기는 이렇다. 폐지 등 재활용품을 수집해 고물상에 파는 어르신의 모습으로 시작해 할아버지, 할머니, 외국인 노동자 등이 일하는 재활용 선별장의 풍경과 해양 쓰레기로 어업이 어려워진 어민들처럼 사회적·지역적 약자에 초점을 맞췄다. 2부는 쓰레기 문제에 주목하는 청년 예술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모든 세대의 일임을 알리고, 재개발·재건축으로 쉽게 철거되는 도시의 건물들과 결국 그 폐기물을 떠안아야 하는 문제를 다뤘다. 가볍지 않지만 결코 무겁지 않고, 묵직한 성찰이 있으면서도 진한 감동이 있다.
코로나19가 창궐하던 2020년 여름. 임 감독은 인천광역시에 위치한 한 재활용 선별장을 방문하게 됐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쌓여 절벽을 이루는 선별장 입구를 보고 ‘들어가도 괜찮을까?’ 망설였다고 한다. 공간이 주는 구조적 압도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입구에 쌓인 거대한 쓰레기더미 너머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문제가 쌓여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곳은 쓰레기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공간이었어요. 쓰레기 폭포의 최전선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대한 기계의 굉음, 온갖 썩은 냄새와 사투를 벌이는 모습은 정말 충격이었어요.”
그가 영화를 만들 때 고민했던 건 ‘수없이 쏟아지고 버려지는 쓰레기들’, ‘그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줍는 약자들’, ‘재개발로 정들었던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저 쓰레기를 처리하는 과정이 아니라 왜 우리가 쓰레기 문제에 주목해야 하는지 짚어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 영화로 그는 지난해 한국독립PD협회의 ‘이달의 독립PD상’과 올해 초 ‘한국독립PD상 우수상’을 받았다. 또 제21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에서 ‘한국경쟁부문 대상’ 을 수상했다.

영화로 만난 사람들

임 감독은 영화를 제작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쓰레기 매립장에 와봐야 한다. 버려지는 곳을 직접 보고, 걷고, 냄새를 맡아야 한다’라고. 그는 쓰레기 처리과정에서 만난 분 대부분이 어르신이었다고 한다.
“나이 들고 힘없는 어르신들이 쓰레기 처리를 떠맡고 있었어요. 재활용 선별장과 소각장에서 만난 어르신들도 계셨고, 폐지를 줍는 어르신도 계셨어요. 바다에 쌓인 해양 쓰레기를 치우는 어르신도 계셨죠. 이들 모두 지구가 더러워지는 것을 막는 첨병들이었어요. 지금 돌이켜 보면 어르신들 덕분에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폐지를 줍는 한 어르신은 조금이라도 돈을 더 주는 고물상을 찾아 차가 쌩쌩 다니는 도로 위에서 손수레를 끄는데, 촬영을 마치고 나서 잔상이 계속 남았다고 한다. “차도가 위태로워 보이는데 인도로 다니면 안 돼요?”라고 물었더니 “인도로 올라가면 울퉁불퉁해서 바퀴가 잘 안 나가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니 부딪힐 위험도 있고, 어쩔 수 없이 차도로 가요”라는 대답에 가슴이 뭉클했다고. 임 감독은 어르신뿐만 아니라 청년 예술가도 만났다. 이들은 재개발 사업이 활발한 인천광역시 서구 구도심에 사는 청년들이었다.
“재개발 사업 찬반으로 갈등이 일어나는 동네 주민들, 오랜 터전에서 떠나는 주민들, 재개발 때문에 방치되는 동네 등을 목격하게 됐어요. 오랫동안 삶이 지속된 동네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죠. 결국 재개발은 실향민을 만들더라고요. 특히 새 문명의 시작처럼 여겨지는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결국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설폐기물을 발생시키는 ‘문명의 끝’ 같았죠.”
드론으로 촬영한 수도권매립지의 전경. 수도권매립지는 조성 당시 단일면적 최대의 쓰레기 매립지로 조성됐다.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 경기도 등 수도권의 모든 쓰레기가 여기로 모여든다. 이곳에서 생활폐기물은 대략 20%, 산업폐기물이 30%를 차지한다. 나머지 절반가량은 건설폐기물인데 어마어마한 양이 매일 버려진다.
“광활하지만 이곳은 무한한 공간이 아니에요. 건설폐기물과 생활폐기물을 비롯한 쓰레기가 포화하는 시점이 언젠가 도래할 거예요.”
그 역시 청년 예술인이 “도시를 버리고 있어요”라고 한 경고가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카메라 너머, 펼쳐지는 세계

다큐멘터리 영화는 임 감독의 전매특허다. ‘이거 뭔가 미묘하게 재미있다’ 싶으면 그걸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 그는 그동안 인천을 기반으로 <만석동의 동물들>, <동구 안 숨바꼭질> 등 도시와 환경문제를 조명한 다큐멘터리를 연출해왔다. 실제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저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보여주기만 하는 건 아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의 시선을 통해 사실을 나열하고, 하고 싶은 말을 다시 어떻게 조합해서 만들지 고민하죠.” 그의 차기작은 서해 최북단 섬이자 철새들의 터전 ‘백령도’다. 백령도에선 2029년 완공 목표로 백령공항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백령도에는 어마어마한 철새들이 오고 있고, 백령도 물범이 서식하는데, 공항 건설로 생태계에 어떠한 변화가 있을지 기록하려 해요. 지리산 반달가슴곰 이야기에 대한 작업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카메라 너머, 더 넓은 세계가 펼쳐진다. 그의 시선에는 언제나 이곳을 살아가는 도시가 있고, 생태가 있고, 사람이 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더 나은 지구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가 다음에 선보일 영화는 무엇일지 사뭇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