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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샘에서

예술의 물을 긷다
자연소재 미술작가 로리킴

그에게 ‘영감’은 어느 날 번쩍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슬쩍 길어 올리는, 소소하되 절대 시시하지 않은 일상의 순간들.
그것이 그를 창작으로 이끈다.
작품의 주재료는 ‘자연’이다.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노방천’이 그것이다.
과거엔 대형 설치작업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주로 그날 만난 자연을 한 땀씩의 손바느질로 캔버스에 옮긴다.
작품의 크기는 작아졌어도 행복의 너비는 커지고 있다.

글. 박미경 / 사진. 성민하

그날의 자연을 그날의 화폭에 그는 그게 너무 좋다. 매일 똑같은 길을 걸어도 그 길 위의 풍경은 날마다 조금씩 달라진다는 사실이. 눈앞에 있는 담쟁이덩굴만 해도 그렇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손톱 크기만 하던 이파리들이 그새 저렇게 자라 넓은 담을 온통 뒤덮고 있다. 색깔도 마찬가지다. 연둣빛에서 초록빛으로 나뭇잎이 매일 조금씩 바뀌는 것을, 햇살이 들이치는 정도나 각도에 따라 덩굴의 느낌이 매번 달라지는 것을 그때마다 감동하며 지켜봤다. 어제와 달라진 오늘을, 오늘과 달라질 내일을 그는 날마다 처음처럼 ‘발견’하며 산다.
“자연보다 아름다운 건 세상에 없어요. 저는 다만 흉내를 내는 것일 뿐, 그 어떤 작가도 자연보다 아름다운 작품을 선보이진 못해요.”
그의 작업실 겸 살림집인 이곳은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이기도 하다. 오래된 아파트인 만큼 오래된 나무들이 많다. 지하철역이 멀지 않은 서울의 한 동네인데도, 철마다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건 그래서다. 그는 매일 아이와 함께 작은 숲을 떠올리게 하는 아파트 앞을 산책한다. 새로 핀 들꽃이며 그새 진 낙엽 같은 것들을 아이와 똑같은 눈높이로 들여다본다. 그 자신도 아이로 되돌아간다.

“작년 이맘때 가졌던 제 개인전 은 일상 속 자연들을 작품으로 기록한 뒤 그것들을 모아 마련한 거예요. 먼 여행지에서 만난 것들이 아니라 제가 사는 곳에서 익숙하게 접해 온 자연 풍경들이요. 팬데믹의 영향이 컸어요. 어딘가로 여행하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제 주변의 ‘보물’들을 탐색하고 관찰하고 기록할 수 있게 됐죠. 그날그날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 한 송이며 풀 한 포기가 얼마나 눈부신 존재인지 저절로 알게 돼요.”

흙으로 돌아가는 재료, 노방천산책하다 주워온 나뭇잎이며 꽃잎을 일기장에 붙이듯 그는 길에서 만난 풍경들을 캔버스라는 일기장에 옮겨 붙인다. ‘붙인다’는 표현을 쓰는 건 그가 ‘나뭇잎 일기장’이라 부르는 작은 천 조각을 손바느질로 한 땀 한 땀 화폭에 옮기기 때문이다. 그 천이 ‘노방’이다. 누에고치로 만든 옷감인데 속이 훤히 비치기에 투명 실로 꼼꼼히 작업해야 한다. 겹겹이 쌓았을 때 색감이 더욱 풍부해지는 노방천 작품을 그는 ‘물을 많이 머금은 수채화’에 비유한다. 붓으로 차곡차곡 색을 중첩하는 수채화와 그 느낌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느낌이 맑고 밝고 따뜻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에 이내 무지개가 뜬다.
“노방천은 자연소재라 오랜 시간이 지나면 흙으로 돌아가요. 작품의 색깔도 서서히 변하고요. 변색마저도 ‘작품의 일부’라 생각해요. 삶의 변화를 수용하는 게 인생이듯 색의 변화까지 받아들여야 ‘진짜 예술’인 것 같아요.”

하찮음 속의 특별함, 사소함 속의 숭고함 그가 작품 속에 일상을 담기 시작한 건 마음이 ‘바닥’까지 가라앉던 2016년 가을의 일이다. 출산과 육아로 작업을 중단한 지 3년이 다 되어가던 무렵이었다. 2009년 라는 전시를 통해 ‘신고식’을 화려하게 치른 그는 공간과 교감하는 대형 설치작업으로 국내 미술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공공 프로젝트나 기업과의 협업도 많이 했다. 동화약품 <생명을 살리는 물> 캠페인 전시, 유한킴벌리 팝업 스토어, 아모레퍼시픽 생태습지 아트 프로젝트, 6·25전쟁 60주년 기념 그룹 아트……. 환경을 주제로 한 설치작품을 자연재료로 만들면서 ‘친환경 설치작가’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몇 년의 경력 단절을 겪으면서 우울감과 불안감에 깊이 빠진 것이다. 어느 날 그 터널의 끝을 만났다. ‘일상’ 속에 그 답이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매일 30분 정도라도 창작을 해 보기로 했어요. 그때 시작한 작업이 그날의 일을 짧은 글과 작은 그림으로 기록한 ‘마음 일지’예요.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그날 만든 음식이나 그날의 다짐, 그날 아이와 나눈 대화 같은 것들을 차곡차곡 작업해 나갔어요. 그것들이 쌓이자 비로소 알겠더라고요. 하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얼마나 특별한지, 사소하다고 여겼던 일들이 정작 얼마나 숭고한지. 그때부터 ‘영감’에 대한 제 태도가 달라졌어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문득 찾아와주길 기다리는 대신 매일매일의 일상에서 스스로 영감을 쌓아가게 됐죠.”
그 기록들을 모아 <마음 일지 Mind Journal>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관람객들과 ‘교감’하는 행복을 그때 처음 느꼈다. 소소한 일상이 결코 시시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별것 아닌 오늘이야말로 별처럼 소중한 날인 것을. 관람객들이 크게 공감해줬다. 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열고 라는 작품을 통해 작가의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쓴 편지를 그림으로 작품화했다.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흔하다고 생각한 자연이 정작 얼마나 특별하고 숭고한지. 자연과 일상이 저의 영감의 원천입니다

누에고치로 만든 옷감‘노방천’을 캔버스로 활용한 작품은 ‘물을 많이 머금은 수채화’처럼 맑고 밝고 따뜻하다. 삶과 예술이 하나 되는 행복 “대형 설치작업을 할 땐 ‘생명’이나 ‘꿈’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았어요. 너무 웅장한 주제들에 천착하느라 삶과 예술이 철저히 분리됐죠. 하지만 지금은 삶과 예술이 그 자체로 하나예요. 멀리 어딘가로 떠나거나 따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 소중한 것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결국 잘 살아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잘 살아야 일상이 튼튼해지고, 일상이 튼튼해야 작품도 아름다워질 거라 믿어요.”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미국의 MICA(Maryland Institute College of Art)에서 순수미술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은 뒤 이십 대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두 나라를 오가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 적이 많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지금 이곳의 자연이, 자기 옆의 소중한 사람들이 오래 떠돌던 그의 영혼에 든든한 뿌리가 돼 주고 있다.
“돌아보면 삶이 온통 자연과 함께였던 것 같아요. 주말마다 친할머니댁에 놀러 가던 어린 시절, 정원에 피어 있던 꽃이며 열매로 소꿉놀이를 하며 혼자 놀곤 했어요. 지금 하는 작업이 그 놀이의 연장이란 생각이 들어요. 화폭 위에 꽃잎이며 나뭇잎을 배치하다 색이 너무 예쁘면 요즘도 설레요. 몰입의 행복은 자연 속에 있어요.” 그는 자신의 두 아이도 자연 속에서 마구 뒹굴며 놀게 한다. 나뭇가지로 함께 무얼 만들기도 하고, 땅을 파며 같이 놀기도 한다. 일과 놀이가 하나인 삶.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인생길을 그는 오늘도 신나게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