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가까이
Column
국내 이차전지 재활용 기업 A사는 올해 임직원을 대상으로 창사 첫 희망퇴직을 받았다. 대규모 설비 투자로 케파(생산능력)를 2배 이상 늘렸지만 2023년 전기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과 리튬 등 전기차
배터리 핵심광물의 폭락으로 매출에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전기차 캐즘 전까지는 글로벌 무공해차 보급 확대 분위기 속에서 광물 가격 급등, 국제사회 환경규제 강화 움직임에 폐배터리 재활용 산업은 유망산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배터리의 핵심원료인 리튬 가격은 글로벌 공급
과잉과 수요 약세로 폭락하며 폐배터리 재생원료 가격보다 광물을 채굴해 쓰는 게 저렴해졌다. 한국자원정보서비스(KOMIS)에 따르면 리튬(탄산리튬) 가격은 정점이었던 2022년 11월 kg당 581위안(현재 환율 기준
약 11만 2,000원)이었는데, 2025년 8월 1일 기준 68위안(약 1만 3,000원)으로 고점 대비 88% 추락했다.
업체 간 경쟁도 치열해져 공정스크랩(배터리의 원재료나 배테러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오는 불량품)을 제값보다 비싸게 확보해야 하는데, 마진이 줄어드니 이중고에 허덕이고 있다. 실제 A사는 공장 가동률이 크게 줄었고
작년 매출이 전년 대비 반토막이 났다. 비슷한 기간 관련 사업에 뛰어든 기업 중에는 이미 철수했거나 철수를 검토 중인 곳도 있다.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다. 북미 최대 배터리 재활용 업체이자 나스닥 상장사였던
‘라이사이클’은 파산 수순을 밟고 있다. 업계는 2028~2030년 배터리 생산 사이클이 돌아올 것으로 보고 있다. 적어도 3년은 버텨야 하는 셈이다. 일각에서는 이 기간을 ‘죽음의 계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부도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나라는 배터리에 들어가는 핵심광물을 대부분 특정국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폐배터리 재활용은 글로벌 공급망 경쟁 심화, 자원안보 측면에서 적극적인 육성이 불가피한 산업이다.
2031년부터 배터리 생산 시 특정 재생원료 일정 비율 사용을 의무화한 ‘유럽연합(EU) 배터리법’ 등 글로벌 환경규제 대응은 물론 탄소중립을 위한 국가온실가스목표(NDC)와도 직결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배터리 핵심원료를 재활용할 경우 채굴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약 80% 감축할 수 있다.
당장은 어렵지만 성장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최근 보고서에서 글로벌 폐배터리 시장이 2023년 108억 달러(약 15조 원)에서 2040년 2,089억 달러(약 290조 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봤다. 특히 미국, 중국, 일본 등 주요 경쟁국이 자국 정부 지원에 힘입어 관련 산업 경쟁력을 확대해 가는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뒤처지면 자원·수출·환경 등 3박자 모두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지난 5월 정부는 ‘배터리 순환이용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세부적으로 4대 부문 14개 과제로 구성된 해당 안은 ▲재생원료 인증제·사용목표제 도입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제품 생산자에게 폐기물 재활용 의무
부여) 대상 전기·전자제품 전 품목 확대 ▲배터리 핵심원료 고순도 회수 등 기술혁신 ▲배터리 전주기 관리기반 구축 등이 주된 내용이다. 이제 막 첫발을 뗀 산업인 만큼 관련 각종 세제 인센티브와 규제 개선 등을 통해
폐배터리 재활용 시장 인프라 형성 등을 뒷받침하겠다는 취지다.
다만 정부안에 담긴 다수 지원책이 적어도 2027년은 돼야 본격 시행되는 것, 직접보조금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는 것 등은 당장 체감할 수 있는 지원이 급한 업계 입장에선 아쉬운 점으로 꼽힌다.
기업의 입장을 이해는 하지만 업계가 처한 어려운 현실, 국익 차원에서 정부 지원이 절실한 분야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피해를 키운 건 기대 과잉, 정확한 수요 예측 없이 섣불리 시장에 진입하거나 무리하게 몸집을 불린
일부 기업 책임 역시 작지 않다. 특히 전기차 캐즘은 돌발 변수도 아니었다. 보급 초기 고비용과 제한적인 충전인프라, 성능 불안 등 현실적·심리적 장벽에 따른 수요 둔화를 일정 부분 예측 가능했고 관련 개별 기업이
이를 몰랐을 가능성은 낮다. 신성장 산업을 둘러싼 기업들의 과감한 투자 경쟁 이면에는 정부 지원을 일종의 ‘안전핀’으로 여긴 배경도 있을 것이다.
정부 보조금 등 산업 특성에 따른 정책적 수혜만을 염두에 두고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고 믿고 싶진 않다. 하지만 5월 정부안에 담긴 ‘현장(업계) 목소리’를 보면 재생원료 수요 부족에 대한 경영 애로,
재사용 제품 공공부문 확대 등 수요처 창출, 각종 인센티브와 규제 개선 요구 등이 주된 내용이다. 물론 이러한 정부 지원도 필요하지만 뼈를 깎는 자구노력이 먼저다.
폐배터리 재활용뿐 아니라 태동하는 어떤 유망산업이라도 정부 또는 기업 어느 한 축의 노력만으로 정착하기 어렵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산업이 경쟁국에 밀리지 않도록 업계의 도움닫기를 뒷받침하는 것은 분명 정부의
중요한 역할이다. 하지만 보조는 결코 메인이 될 수 없고, 무한하지도 않다. 업계가 정부 지원으로 세계와 눈높이를 맞춰 점프할 수만 있다면, 각자 쥔 공으로 목표점에 스파이크를 꽂아넣는 것은 기업의 몫이다. 득점은
기업에 밸류 업, 정부에 성장률이라는 과실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