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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판지의 변신은 무한대
    친환경 장애 아동 보조기기로 탄생

    • 최행좌
    • 사진 김준후
  • 친환경 골판지의 쓰임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하다. 이제는 단순히 포장재로서의 기능을 넘어 장애 아동을 위한 보조기기로 활용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경기도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가 개발한 친환경 DIY 보조기기의 이야기다. 이는 아름다운재단과의 다년간 연구를 통해 친환경 소재인 골판지로 누구나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DIY 제품으로 국내 최초의 친환경 DIY 보조기기 개발 사례로 꼽힌다.
강인학 경기도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 센터장
가격부터 편의성, 견고함, 환경까지 모두 챙겼다

택배 상자로 우리에게 익숙한 ‘골판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판지와 골심지를 합쳐서 만든 종이다. 골판지는 그 자체로 최종적인 완성품이 아니다. 이 골판지를 적당한 크기로 자른 뒤 접어서 만들어내야 ‘골판지 상자’ 같은 최종적인 생산물이 된다. 그런데 이 골판지가 장애 아동을 위한 보조기기에 활용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이를 개발한 경기도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는 국내 최초의 보조기기 전문기관으로 2004년에 설립했다. 장애인과 노인 등이 일상생활의 불편을 해소할 수 있는 보조기기를 추천 및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 교육, 보조기기 연구개발, 보조공학 동향 공유를 위한 콘퍼런스 개최 등 다양한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이 가운데 보조기기 연구개발 및 보급은 경기도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의 핵심 사업 중 하나다.
“장애인이나 노인의 일상생활에 편의를 위해서는 보조기기가 필수적이지만 이면에는 ‘사용이 어렵다’, ‘비싸다’, ‘수입품이다’ 등의 꼬리표가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저렴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조작하고 사용할 수 있는 보조기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점에 착안해 친환경 DIY 보조기기를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지구온난화와 자원순환 등의 환경적 측면이 이슈가 되고 있는 요즘 친환경 소재인 골판지를 활용한 보조기기를 개발한 것이죠.”
친환경 DIY 보조기기는 장애 아동의 눈높이에 맞게 밝은 노란색을 선택, 푹신함과 통기성을 고려한 에어매쉬 재질의 시트부터 안전을 위해 깔끔한 마감 처리, 호기심을 자극하는 자동차를 모티브로 한 디자인까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섬세함이 깃들어 있다.
‘목재나 스틸에 비해 골판지가 강도나 기능성이 약한 것 아닐까?’라는 생각은 괜한 걱정일 뿐이다. 친환경 DIY 보조기기에 사용된 골판지는 삼중골판지로 목재만큼 견고하고 가격 대비 경쟁력도 뛰어나다. 친환경 DIY 보조기기는 장애 아동이 앉아서 일상생활을 하거나 올라서서 운동을 해야 하기에 안전성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폐지를 재활용하여 시트를 제작할 경우 횟수에 따라 강도가 약해질 뿐만 아니라 오염물질이 종이 안에 잔류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때문에 친환경 DIY 보조기기는 유해 물질이 없는 삼중골판지를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국내 최초 친환경 DIY 보조기기의 탄생

경기도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는 지금의 친환경 DIY 보조기기를 완성하기까지 몇 번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처음에는 골판지로 제작한 보조기기가 대단히 혁신적이지 않더라도 저렴한 가격으로 장애 아동을 키우는 가정에서는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개발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안전하게 사용해야 하다 보니 소재나 구조, 디자인 등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당연히 비용이 점차 상승하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로 인해 골판지 수입도 여의치 않은 데다가 원자재가 상승하다 보니 당초 생각한 개발 취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장애인을 위한 보조기기 하나를 만드는 데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개발 비용도 만만치 않다. 보조기기를 순조롭게 개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름다운재단 지원 덕분이었다. 아름다운재단은 공익적 성격을 띠고 있고, 사회적 가치 실현에 중점을 두는 다양한 사업을 진행한 차에 친환경 보조기기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다행히 아름다운재단에서 개발과 보급에 필요한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에 2018년에는 장애 아동이 앉아서 식사하고, 학습할 수 있는 ‘입식형 의자’와 치료·훈련에 필요한 ‘벤치’를 개발했다. 그리고 2019년에는 개발된 두 가지 보조기기를 보급하면서 이전에 개발한 의자 형태와 다른 ‘좌식형 의자’와 장애 아동의 놀이와 훈련 등에 활용할 수 있는 ‘밸런스보드’를 동시에 개발했다. 마지막으로 2020년과 2021년에는 개발된 4가지 제품을 보급하는 사업에 주력했다.
보조기기 개발 과정에서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자문 위원단도 구성했다. 보조공학 관련 교수, 장애 아동 보육어린이집 원장님, 디자인 전문가 등이 참여했고, 초기 개발품이 제작되었을 때 실제 장애 아동을 대상으로 사용성 평가를 진행했다.
“시제품이 나와서 장애 아동 가정에 일정 기간 동안 사용한 후 장애 아동 부모님께 사용 후기와 평가를 듣고 시제품은 수거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보조기기를 사용한 장애 아동이 가져가지 말라고 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만큼 장애 아동에게 꼭 필요한 보조기기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나중에 더 예쁘게 만들어서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장애 아동이 사용하기 실제로 불편한 곳은 없는지, 개선할 부분은 없는지 더 세심하게 살폈다. 이후 보조기기가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을 때에는 공인인증기관을 통해 소재와 구조의 안전성을 검증받았다. 이로써 국내 최초 친환경 DIY 보조기기 4개는 디자인권과 특허권 등록을 완료했다.

자원 선순환을 넘어 복지 증진에 기여하고픈 꿈

개발된 친환경 DIY 보조기기는 2019년부터 보급하고 있다. 8세 미만의 장애 아동과 이들이 이용하는 기관을 중심으로 보급한 결과 올해 11월 기준 466명의 장애 아동과 120개 기관에 총 1,111대의 보조기기를 지원했다.
이용자들의 후기는 “종이라고 해서 약할 줄 알았는데 너무 튼튼해요”, “가볍고 깔끔하고 활용하기에 너무 편해요”, “조립 설명서를 보고 직접 만들 수 있어서 신기해요” 등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원자재 인상이 지속되면서 언제까지 저렴한 가격으로 친환경 DIY 보조기기를 제작해 보급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 소비자인 장애인과 노인 등의 욕구를 반영한 보조기기를 저렴한 가격과 최상의 기능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있습니다.”
강인학 센터장은 골판지로 새로운 아이템의 보조기기를 개발하는 방향에 대해서도 고민 중이다. 예를 들어 높낮이 조절이 가능하거나 접이식의 장애 아동을 위한 책상이나 운동 기능 개선을 활용할 수 있는 재활용 보조기기 등이다. 최근에는 EPP(Expanded Polypropylen, 발포 폴리프로필렌) 소재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친환경 소재로 가볍고, 변형이나 제작이 용이하고, 리사이클링 가능하기 때문이다.
경기도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는 2010년부터 보조기기 다시쓰기 사업을 하고 있다. 고가의 보조기기를 불필요할 경우 단순히 폐기하기 대신 정비와 세척을 통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지원함으로써 자원을 절약하고, 선순환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 사업을 통해 연간 100여 개의 보조기기를 기증받아 70~80여 명에게 지원하고 있다. 소비자가의 50%로 환산했을 때 약 3,100만 원의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보조기기를 통해 장애인과 노인 등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우리의 사명이라고 말하는 강인학 센터장은 앞으로도 보조기기 연구개발을 지속하는 것은 물론 친환경 DIY 보조기기를 개발도상국에 보급함으로써 복지 증진에 기여하고픈 계획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