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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리풍경을 채집하는
    소리탐험가

    김창훈 사운드아티스트

    • 이지연
    • 사진 이서연

    음성안내

  • 블랙머니(2019), 만신(2014), 배우는 배우다(2013) 등 영화 음향감독으로 일한 지 20여 년. 김창훈 감독은 영화 작업을 기반으로 ‘소리풍경(Soundscape)’을 온전히 담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 ‘라온레코드(Raon Records)’를 설립했다. 다양한 동·식물의 소리, 파도·바람 등 자연현상이 만들어내는 소리풍경을 채집하기 위해 제주로, DMZ로 걸음을 옮겼고 4장의 사운드스케이프 앨범을 냈다. 그 여정 속에서 그의 발걸음은 광주로, 또다시 제주로 삶의 소리들을 찾아 떠났다.
제주 물찻오름에서 느낀 지구의 리듬

사운드스케이프는 소리(Sound)와 풍경(Landscape)의 합성어로 현장에서 들리는 자연적이고 인공적인 모든 소리를 포괄하는 소리환경을 의미한다. 1970년대 캐나다의 작곡가이자 생태운동가 머리 셰이퍼(Murray Schafer, 1933~)가 주창한 개념이다. 김창훈 감독은 2003년, 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작업을 할 때 사운드스케이프를 알게 됐다. 후반 작업에 사용할 별도의 앰비언스(Ambiance, 특정한 공간에 존재하는 음향)가 필요해 제주로 향한 그는 새벽녘 제주 어촌 소리를 녹음하면서 ‘독립적인 사운드만으로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일이 뭘까’를 고민했고 여러 자료를 찾다 사운드스케이프와 만났다.
운 좋게 사려니숲의 산정호수 물찻오름에서 생각지도 못한 경험을 했죠. 새벽 5~6시에 들어가 1시간 남짓 시간이 흘렀겠구나 하고 시계를 보니 대여섯 시간이 훌쩍 지났더라고요. 외부의 소음 없이 온전하게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흠뻑 빠져 있었어요. 휘파람새의 공명이 공간감을 느끼게 하고, 사이사이 까마귀가 울고, 멀리서 작은 새들의 지저귐이 덧입혀지는 자연 속에 앉아 어렸을 때 일부터, 서울에 올라왔던 때의 모습 그리고 내가 왜 여기 와 있는지 여러 풍경들이 떠올랐죠.”
물찻오름에서 잠시 시간에 갇힌 것 같은 신묘한 경험을 한 김창훈 감독은 녹음해 온 사운드스케이프를 듣던 중 높이 떠가는 비행기소리가 들어왔다는 걸 확인하고는 그 구간만 잘라 이어붙이면 되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도저히 작업이 이어지지 않았다. 1차적으로 우리 귀에 들리는 소리 너머, 지구가 내는 배음이 들렸기 때문이다. 비행기 소리를 잘라내면 큰 돌이 굴러가는 것처럼 구궁구궁 대는 지구의 배음까지 삭제되고, 일정한 리듬을 가진 배음의 운율이 단번에 깨졌다. 하여 소리를 잘라 붙이지 않고 계획했던 것보다 짧은 4분 대로 앨범에 수록했다. 첫 번째 앨범인 <지구의 리듬 : 제주 사운드스케이프>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때 그 시간과 장소, 자연환경이 만들어준 소리풍경

물찻오름에서 느꼈던 기분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었던 김창훈 감독은 오랫동안 자연 그대로 보존된 DMZ를 다음 작업 장소로 정했다. DMZ영화제지원작으로 선정된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면서 녹음 작업을 병행했다. 을지 GOP, 장항습지, 안동철교, 도피안사 등 DMZ 접경지역을 돌던 중 그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 ‘카르마(Karma)’와 만난다.
“녹음 중에 비가 내리는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5월 27일, 일정에 변수가 생겨 도피안사(到彼岸寺)라는 사찰로 갑자기 장소를 옮겼는데 녹음 과정 중 토독토독 소리가 들려 손을 뻗어 보니 비가 내리고 있더라고요. 땅으로 떨어지는 첫 빗소리를 운 좋게 녹음한 거죠.”
때마침 저녁예불을 알리는 범종소리가 울렸고 본능적으로 녹음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마이크가 놓여진 그 상태 그대로 녹음버튼을 눌렀다. 처마 위에 매달린 풍경이 비바람에 마구 흔들렸는데 그 소리가 무척 거슬렸다. 범종소리는 컸다가, 깨졌다가 일정치 않았다. 또 범종소리를 담기에는 녹음 위치도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운드스케이프의 결과는 아름다웠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욕심에 다음날 도피안사에 다시 가 최적의 장소에 자리를 잡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2~3분 녹음하다가 껐어요. 어제의 비바람, 풍경소리, 불규칙적인 범종 소리, 잠깐 잠깐 들리는 새 소리…. 이 소리환경은 누가 세팅할 수도 없고 다시 만날 수도 없는 그때, 그 시간과 장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연현상이었음을 깨달았죠. 내게 그때 범종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다 <금강경>이라는 불교서적을 보게 됐고, ‘카르마’ 라는 제목을 붙이게 됐죠.

삶의 소리, 그 너머의 이야기들과 마주하다

김창훈 감독에게 사운드스케이프 작업은 매번 다음 가야 할 길을 알려주었다. 잊지 못할 순간들이 우연인 줄만 알았는데 실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2018년 일로, 관광으로 종종 갔던 제주에서 자주 머물렀던 숙소 주인으로부터 우연히 1924년생 이상숙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녹음해야겠다는 강한 열망이 생겼다. 고양이가 새끼 낳은 이야기부터 할머니 결혼하던 때의 이야기, 제주 4·3사건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질곡하게 살아온 삶의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3번째 사운드스케이프 <나, 물동이 이상숙이우다>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당시 94세였던 할머니는 2년 뒤 돌아가셨다.
작곡가 원일은 앨범 서문을 통해 “소리를 통해 포착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소리들의 신비가 교차하는 이 음반은 힘주지 않고 오리지널 제주도의 한 단면을 사운드에 오롯이 담아낸 소리인류학이자 사운드에콜로지(Sound Ecology)의 빛나는 보고서”라고 평했다.
이듬해인 2019년 5월, ‘광주’로 달려간 김창훈 감독은 5·18민주화운동의 현장들을 찾아가 현재의 풍경을 소리로 기록했다. 그리고 올 4월 16일부터 18일까지는 세월호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단원고 학생들의 수학여행 일정을 따라 제주를 돌며 <블루 하와이(가제)> 작업을 이어갔다. “처음엔 자연의 소리가 너무 좋고 귀하고 아름답고 포근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질 것만 같아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자연의 소리들이 결국 삶의 소리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브리지 역할을 해준 것 같아요.”
영화 현장에서는 배우들의 소리를 오롯이 담아내기 위해 ‘침묵’해야 한다는 김창훈 감독은 자연과 사람들, 삶의 소리들을 채집하며 정작 그가 하고 싶은 ‘말’들을 꺼낸다. 그에겐 이 과정이 일종의 환기이자 힐링이다.
인간의 편리와 개발논리로 인해 훼손되어가는 자연과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숲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는 그는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구는 이미 변화의 소리들을 온몸으로 내고 있기에 환경이 지키겠다는 인간의 결단과 행동만이 변화의 속도를 멈출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강조한다.
여름이면 태양의 열기를 받아 차가웠던 철들이 느슨해지며 ‘쾅’, ‘쾅’ 소리를 내는 DMZ 접경지역 ‘안동철교’의 소리, 시원한 분수 속에 제 몸을 던져 물놀이 하는 아이들의 소리, 상수동 어느 뒷골목 좁은 풀밭에 숨어 찌르르르 소리를 내는 풀벌레 소리가 떠오른다는 김창훈 감독.
녹음기사님, 감독님, 작가님 등 남이 불러주는 명칭 대신 김창훈 감독이 자신에게 붙여준 ‘소리탐험가’라는 수식. 그는 소리탐험가로서 세상의 소리들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소리풍경들을 채집하며 세상에 말을 걸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