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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리에 취하다

    • 글, 사진 김담 작가

음성안내

흙비가 지나간 뒤 산마루를 넘어온 바람은 숲의 정수리를 뒤흔들며 동쪽으로 나아갔다. 소나무 꽃가루가 연기처럼 흩어지는 사이 미추룸한 층층나무는 흰 꽃숭어리를, 그 틈새로는 키 작은 노린재나무와 고추나무가 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숲 기스락 바닥에는 애기나리가 떼판을 이루었고, 쥐오줌풀은 막대사탕 모양의 자줏빛 꽃을 남산제비꽃과 노랑제비꽃이 진 뒤엔 졸방제비꽃과 콩제비꽃이 가만바람에도 끄덕끄덕했다. 삼지구엽초는 돛단배와 같은 연하디연한 꽃을 내밀었고, 무엇보다 우리 특산종인 요강나물도 검은 융단 같은 꽃봉오리를 열고 있었다. 이파리는 초식동물에게 먹힌 뒤였다. 이렇듯 크고 작은 꽃들이 벌과 나비를 불러모으는 동안 떼판을 이룬 은방울꽃은 그 향내만으로도 숲을 휘청거리게 했다.
바람결에 얄랑얄랑하면서도 그러나 꺾이지는 않는 꽃대를 따라 벌과 나비들은 서로 갈마들면서도 엉키지는 않고 순간순간 자리를 옮겨다니며 검질기게 꿀을 탐했다. 꽃송이와 꽃망울 사이를 오가는 벌떼는 멀리서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나 나비떼는 소리도 없이 날아서 날갯짓을 쫓는 눈길이 사뭇 분주했다. 꽃대를 빼곡하게 채운 진딧물을 향해 무당벌레가 날아드는 사이 개미 또한 부지런히 꽃대를 오르내렸다. 맞자라는 것은 비단 개미와 진딧물 뿐만은 아니어서 직박구리는 버찌를 물어 나르느라고 북새통이었다.
숲속 계곡은 기스락과 기스락 사이를 휘돌아 가고 있었으며 너럭바위를 만난 물줄기는 폭포를 이루기도 하고, 용소에서는 어룽어룽한 물빛이 되기도 하면서 이따금 바람결을 따라온 나뭇잎 배의 정거장이 되기도 했다. 깎아지른 듯 가파른 기슭 바위틈에는 꽃잎이 진 돌단풍이 너풀거렸으며 떡갈나무와 쪽동백나무 이파리는 사선으로 비낀 볕뉘를 따라 하늘거렸다. 용소로 떨어지면서 거세찼던 물소리는 너른 계곡을 지날 때는 한껏 소리가 낮아진 채 유장했다. 겨울 초입이면 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에 등장하곤 하는 물까마귀 둥지가 바위벼랑 어디쯤에 있을 법도 하건만 물까마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까마귀소리와는 사뭇 다른 물까마귀 소리가 이명처럼 들렸다.
산 중턱에 이르면 멀리 동해가 한눈에 들어왔고, 파도는 모래불에 흰 거품으로 떠올랐다 잦아졌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듯했으나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그 사이를 놀란 고라니 울음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때때로 비둘기 소리가 섞여들기도 했지만 고라니 울음소리는 좀처럼 안정할 수 없는 소리였다. 그럴 때는 내 발에 밟히는 낙엽 부서지는 소리조차 뱀을 본 듯 움츠러들게 했다. 비탈진 골짜기, 아름드리 소나무와 굴참나무들 사이에 드레드레 꽃을 피운 쪽동백나무 꽃숭어리들이 낙엽 위를 수놓았다. 검은등뻐꾸기 울음이 숲정이를 가로지르는 동안 꽃 이파리들은 보드라운 명지바람에도 통째로 떨어져 내렸다.
태양광발전소와 발전소 사이 길고 좁게 난 골짜기 무논에서 시작된 개구리들 합창이 마을 안쪽까지 이어졌다. 해 질 무렵이면 귀가 먹먹해지도록 울었다. 이웃집 풍산개들과 동네고양이들은 알은척하지 않았지만 가던 길을 멈추고 발을 굴렀다. 그때뿐, 개구리들은 또다시 들불처럼 서로 호응하며 이 논 저 논에서 아우성이었다. 저녁 바람이 수면을 쓸고 가도 제비가 물위를 스치듯 낮게 날아도 울음소리는 길게 이어졌다. 그 틈으로 하천 덤불숲에 둥지를 튼 휘파람새 울음소리가 더해졌다. 방울새가 떼를 지어 하늘을 휘젓는 사이 물총새는 물속으로 낙하했으며 개개비는 붉은머리오목눈이와 갈대숲에서 숨바꼭질이 한창이었다.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뒤 찔레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동안 물소리는 새소리에 섞이고 바람결에는 여름볕이 스며들었다. 그 사이 호랑지빠귀 소리가 새벽을 깨웠다. 어슬녘부터 들리기 시작한 새소리는 이른 아침에도 변함없이 아니 쉬지 않고 공기를 갈랐다. 새는, 그리하여 밤새 안녕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