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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살과 바람과 물결,
    스치듯 머물다

    김미영 작가

    • 권주희
    • 사진 남윤중
  • 햇빛 아래 반짝이는 잎사귀, 흐르는 물살에 반질거리는 조약돌, 폭신하게 밟히는 흙길. 김미영 작가는 자연 속에서 마주한 인상적인 순간, 그 감각과 기억을 하나하나 캔버스에 담아낸다. 깊되 무겁지 않게, 긍정과 행복의 에너지를 전하고자 한다.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은 관객의 마음속에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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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일상적이고도 아름다운

예술은 어렵고, 미술 작품은 심미안을 갖춘 이들의 관심사라고 생각하곤 한다. 뭔가 심오한 철학이 있을 것만 같아 한발자국 멀어지곤 한다. 김미영 작가는 그저 작품을 가만히 바라보길 권한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작가의 에너지가 느껴질 테고, 서서히 마음이 열릴 테니 말이다.
“특별한 경험이나 엄청난 사건이 아니라 일상적인 순간들이 작품이 되는 것 같아요. 작업실로 출근하는 길에 내리는 빗방울, 타국의 여행지에서 느낀 습기와 열기, 이런 것들이 캔버스 위에서 형태가 되고 색이 입혀지는 것 같아요.”
김미영 작가에게 예술적 영감은 바로 일상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이 일렁이는 물결 같기도 하고,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 같기도 한 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12월 김미영 작가는 이화익갤러리에서 <Touch of Eyes>를 타이틀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 선보인 작품들은 한층 더 가볍고 유연한 느낌이다. 건강도 챙길 겸 시작한 등산이 그의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던 모양이다.
“산을 오르다 보면 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달라지는 걸, 도심보다 더 생생하게 피부로 접할 수 있어요. 계곡에 손을 담구기도 하는데요, 물살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려갈 때나 손바닥으로 물살을 거스를 때 느낌이 되게 좋더라고요. 묵직하고도 유연한 물살의 속도감을 회화적으로 풀어보려고 했어요.”
그의 작업은 꼼꼼하고도 꾸준하게 진행된다. 먼저 캔버스에 바탕 색을 입히고 샌드 페이퍼로 매끄럽게 갈아낸다. 그리고 나서 수직과 수평, 사선으로 그리드를 그려 구획정리를 한 후에 색을 만들기 시작한다. 여러 물감을 혼합해 원하는 색을 만들 뿐만 아니라 매트하거나 글로시한 질감까지도 구현하기 위해 애를 쓴다. 여기까지는 밑 작업이고 이후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한다. 자연과 일상의 감각과 기억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것.
최근 들어 그는 붓이 아닌 나이프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이프를 사용해 시간이 더 오래걸리더라도 두꺼운 물감 덩어리들을 캔버스에 올리면서 ‘눈으로 만지듯이’ 작업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다양한 색채에 시선이 머물지만 측면에서 바라보면 물감들의 굴곡에 손끝을 대고 싶어진다.
“과감한 접촉이 아니어도 나에게 울림을 주는 표면의 텍스처 위에 손을 올려놓을 때, 영감을 주는 공간을 눈으로 천천히 훑을 때, 때로는 햇빛과 어우러지는 결의 움직임을 바라볼 때에 나에게는 영적으로 다가오는 순간마저 있다. 그런 임팩트 있는 순간은 나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기에 이렇게 촉각과 이어지는 시각의 표면에 대하여 다루고 싶었고, 그 과정은 단순하면서도 다양한 실험을 통해 이루어졌다. 우리의 오감은 지금도 이어져 상호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눈으로 만지듯 그림을 그린다.”
- 작가 노트 중에서

감각과 기억의 물결

김미영 작가는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현재는 추상적인 유화 작업이라 큰 변화를 맞이한 듯 보이지만 의도적인 전환이 아닌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이었다. 더불어 동양화를 통해 배운 경험과 지식은 지금의 작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전파하고 있다. 은은하게 번져 나가던 붓질은 입체적인 터치로 변화했고, 분채와 아교와 물을 섞어 만들던 동양화적 물감 만들기의 방법에서 영감을 받아 유화 재료들을 섞어 제조해 사용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풍이 부는 듯하다. 바람이 살결에 닿을 때 느낌을 담은 ‘웜 브리즈(Warm Breeze)’, 상큼한 노랑 초록의 물감이 차곡히 쌓인 ‘레몬 브리즈(Lemon Breeze)’ 등 계절과 날씨, 냄새와 향기가 가득하다. <Touch of Eyes> ‘전시서문’에서 추성아 독립 큐레이터는 그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그동안 김미영의 작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색은 사계절을 타는 직관으로 신체의 모든 감각들을 불러내기도 한다. 이는 프루스트가 느꼈던 여름 땡볕의 바스락한 열기일 수도 있고, 더위를 달래기 위한 싱그러운 레몬과 민트 향 혹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검은 낙엽송과 가을에 지는 노을을 연상케 한다. (중략) 김미영에게 회화는 무엇이 그리는 것이고 만드는 것이었는지, 화면 안에 존재들을 지속적으로 뒤집어 보려는 실험일 것이고, 일상과 시간을 통해 물성, 도구를 통해 어디까지 확장시킬지 기대해 본다.”
햇살 가득한 봄날, 잠시 머물던 생각과 상념들을 김미영 작가의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면 그에겐 그보다 더 좋은 감상은 없을 것이다. 일상의 풍경들에 환한 빛을 더하는 그의 작품을 한 번 더 바라보길, 그의 작품과 함께 올해 봄이 조금 더 환해지길 기대한다.

우리의 오감은 지금도 이어져
상호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눈으로 만지듯 그림을 그린다.

김미영 작가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후, 영국 런던의 왕립예술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국내외에서 다양한 전시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