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영역

  • 봄빛에 물들다

    • 김담 작가

음성안내

바다로부터, 땅으로부터 봄의 기별이 오는 사이 난데없는 소나기눈이 내렸다. 미역 나물과 냉이된장국의 그 다디단 맛이 입안에서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낮도 밤도 아닌 어스크레한 시간에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어느새 비도 눈도 아닌 진눈깨비로 바뀌더니 그예 꽃송이처럼 엉긴 함박눈이 되어 세상을 뒤덮었다. 빗물에 녹아내리면서도 눈은 급기야 길눈이 되었고, 겨우내 눈도 비도 없이 까맣게 메말랐던 대지는 켜켜이 쌓인 눈으로 인해 아득한 흰빛의 눈세계가 되었다. 너절하고 어지러운 오탁의 세상에서 한순간 깊이를 알 수 없는 순정한 신성의 세계로 뒤바뀌었다.

눈더미에 갇힌 세상은 모처럼 초근초근해졌으나 설날 무렵 다녀왔던 얼음새꽃(복수초) 군락지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볕바른 무덤 자리에 복과 장수를 상징한다는 복수초 꽃잎이 세상을 노란 빛으로 물들이고 있던 터였다. 검붉은 빛으로 시작한 여린 듯 환하고 투명한 빛깔의 꽃잎은 얇은 듯하면서도 도탑고, 가벼운 듯하면서도 그윽하여서 마치 커다랗고, 둥근 연꽃을 들여다보는 듯 웅숭깊었다. 그 어름에 앉아 기스락 어디쯤에 외따로 서서 너른 들판을 수호하듯 서 있는 오래 묵은 진초록의 외솔을 바라다보았다.

강물이 얼고 녹기를 반복하는 동안 솔숲 정수리에는 개구리매가 등장했다. 티끌조차 없는 새파란 하늘에 검은 점으로 드러난 새는 한 마리인가 했더니 어느 순간 저쪽에서 또 다른 한 마리가 나타나 서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한 방향으로 날았다가 갑작스레 방향을 바꾸기도 하면서 오래도록 하늘을 맴돌았다. 맹금의 날짐승들이 하늘 높이 떠올라 날개짓 없이 활상하는 모습은 경이로웠지만 지난해는 무슨 일인지 부엉이도 울지 않았고, 황조롱이와 말똥가리도 쉽게 볼 수 없었다. 그들이 앉곤 했던 숲정이 근처에 있는 전봇대에는 바람소리만 오고갔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겨울밤은 할머니가 떠난 빈자리처럼 허영허영했다.

방울새 무리가 마을을 휘젓는 동안 개개비 떠난 덤불숲에서는 붉은머리오목눈이와 노랑턱멧새가 어울렸다. 때까치와 딱따구리는 버드나무 삭정이에 갈마들었다. 딱따구리가 삭정이를 쪼아대는 동안 때까치는 나뭇가지 끝에 앉아 먼 들을 내다보았다. 입춘을 지난 뒤 재바른 농부의 논들은 이미 갈아엎어졌고, 물이 고인 무논에는 백로가 어정거리며 미꾸라지를 낚아챘다. 매번 무논을 홀로 오고가는 백로는 무엇보다 인기척을 날카롭게 알아챘으므로 채 이십여 미터도 다가가지 않아서 이미 날아올랐다. 매일같이 보면서도 서로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러려니 하면서도 어쩐지 아쉽고 서운했다.

어슬녘 이슬비가 내리는 강둑을 걷다가 문득 발을 멈췄다. 강 저쪽에는 수양버들이 서너 그루 무리지어 있었고, 솔숲을 배경으로 이른 봄의 기색을 드러내는 곳이었으므로 샛바람 속에서도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멧돼지 떼였다. 줄지어 걸어가는 멧돼지들은 무려 일곱여덟 마리쯤 되었고, 이들은 서두르지도 그렇다고 급하지도 않은 걸음으로 은밀하면서도 어엿하게 비탈을 가로질러가고 있었다. 부룩소 크기만 한 멧돼지들이 검푸르죽죽한 숲속의 눈무지 위를 걸어가는 모습은 마치 환영을 보는 듯했다. 맨 뒤에 가는 멧돼지가 가장 커 보였다.

아프리카 돼지열병이 기승을 부리면서 강둑과 산 기스락 근처에는 쇠울타리가 쳐졌고 사냥꾼들이 등장했으며 항공방제를 하는 동안에도 멧돼지들은 새끼를 낳고 기르면서 큰길에서 멀지 않은 곳을 서슴없이 나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운명을 점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들이 사라진 골짜기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들이 지나간 골짜기에는 들샘이 흐르고 물길 아래쪽에는 미나리의 푸른 싹이 돋고 있었으며 죽은 통나무에서는 초록의 이끼들이 싹을 밀어올리고 있었다.

겨울과 봄이 경계 없이 서로 스미고 어긋나면서 시나브로 이어지며 또한 바뀌는 것처럼 죽은 것과 산 것의 경계가 모호하고 흐리터분했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흰 눈은 때때로 무자비하여 아름드리 소나무와 귀룽나무 줄기를 꺾고 가지를 찢었으나 생강나무만 들썩이며 꽃망울을 열고 있었다. 뿌리가 뽑힌 오래된 매실나무 또한 꽃망울을 터뜨렸다. 꽃향기가 떠도는 혼들처럼 여겨졌다. 눈이 녹고 있는 산비탈 푸릇푸릇한 호밀 밭에는 엉덩이에 뚜렷한 흰 점이 있는 노루들이 내려와 풀을 뜯고 있었다. 몸을 돌릴 때마다 흰 점은 나타났다 사라졌고, 그 사이 멧비둘기 울음소리가 골짜기를 비껴갔다. 숲속 깊고 응달진 돌 틈 사이엔 보랏빛 노루귀가 꽃을 피웠다.

인간의 눈이 볼 수는 있으나 명명할 수 없는 색뿐만 아니라 흔히 오방정색이라고 하는 색들 가운데 흰색이 고결하고 거룩한 신성을 드러내는 색깔이라면, 검은색은 빛의 부재일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보이는 것만 보는 인간의 가시의 영역일 것이었다. 그랬으므로 초록으로 뭉뚱그리는 푸른빛은 아마도 영원한 자연의 색일 터.